2016.12.23. 이사야 9:1-7
< No turning Back. >
: 은 개똥 결코 돌아서지 않는 내 모습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수없이 들었을 진데, 왜 ‘나’는 계속하여 죄를 짓고 그 죄의 찔림에서 벗어 날 수 없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할 무렵 나에게 그 찔림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고, 바울이 갖고 있던 육체적인 고통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었다.
동의 되었다. 그래서 인간의 갖은 한계이자 동시에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축복이다. 아멘 되었다. 은혜 되었다. 내가 유한한 것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하나님의 큰 은혜라고
나는 착각했다.
하나님을 나의 인지구조 속에 가두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위해 이해한‘척’하려 하나님의 사랑을 내 마음대로 제단하고 갖다 붙였다. 내가 만든 죄 기준과 스스로를 정죄함으로 피조물인 내가 창조주가 되어 판단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 나는 신이었다.)
영원히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죄의식 속에서 몸부림치는 상태로 내버려두시는 그런 허접쓰레기 사랑으로 내가 바꿔 먹어 버렸다.
죄에서 자유함은 죄의 찔림에서 자유함은 완전한 해방인데, 알지 못하고 실제로 그것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으니 내 마음대로 받아들인 것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우리말] 4 그들을 짓누르던 멍에와 어깨를 내리치던 회초리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꺾으시던 날처럼 주께서 부숴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 완전히 희게 하시는 그 하나님께서는 내가 마음대로 생각한 나의 기준마저도 가져가버리셔서 죄의식 자체도 완전히 태워주시는분이시다.
물론 그 과정은 괴롭고 괴롭다. 내가 나됨을 주장하지 않도록 나를 철저히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괴롭히시고 방관하시고 압제자의 몽둥이를 빌려 채찍질 하셨다. 모든 것이 공허하고 느껴지지 않는 하나님을 붙잡으려 하다 포기해버리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내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의 그렇게 우리의 자아를 찢어버리시고 들어오신다. 그 크신 사랑은 정말 큰 파도와 같아서 무시할 수 도 없으며; 도망칠 수 도 없다.
오늘 결론은 본문에는 잘렸지만 8절이다.
8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
주 예수그리스도 성령이 임하시니 끝이 났다.
내가 나됨을 주장할 수 없게 돼버렸고
내가 갖고 있던 모든 기준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내가 피조물임을 실로 드디어 자각하게 되었다.
그랬더니 자유가 찾아왔다.
그 무거운 짐이 사라지고;
예수그리스도께 가서 평안을 얻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무거운 짐 진 자 다 내게로 와서 쉬라.”
아, 하나님의 섭리하심은 이런 것이구나.
참으로 가볍고 좋다.
참 좋다.
이것이 ‘복음’이구나.
오늘도 아멘. 아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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