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인생의 선악의 기준과 옳고 그름의 기준을 찾을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심 또는 종교인의 경우에는 그가 속한 경전에서 찾는다. 경전에 속한 글을 직접 읽음으로 또는 그것을 연구한 사람들을 통해서 뜻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선악 기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부모를 통해서 양육 당하면서 옳고 그름의 기준이 생겨나는 것도 마찬가지이며, 사회적 합의를 통한 법적 질서 또한 마찬가지이고, 문화적 관습 ‘예’법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말하고자하는 부분은 그 선악을 생각할 때, 어떤 상황이든지 옳음과 그름을 판단하는 주체는 ‘나’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갖고 있는 ‘가치관-또는 주관 생각’으로서 행동을 하고 삶을 살아가게 된다. 모습자체가 하나의 주관자로서의 입법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통해서 본인의 가치관이 형성되었든지 모든 판단의 기저에는 본인이 갖고 있는 새롭게 본인만의 재구성된 선악의 체계를 통해서 판단하기 때문이다.
(순Siri&닭 사건도, 그들에게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양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일반적 대중들이 말하는 양심이 작동되지 않는 선악기준을 즉, 본인들의 다른 사람과 다른 양심은 갖고 있다.)
본인에게 외부적이든 내부적이든 새롭게 구성된 본인들의 옳고 그름의 가치관을 성경에서는 율법으로도 부르고(주어진 율법을 본인이 새롭게 구성하였으므로), 양심으로도 부른다.(성경의 율법을 보지 않더라도 본인이 선악체계를 갖고 있으므로)
이 상태를 ‘준행자’라고 부르지 않고 ‘입법자’라고 부른다.
법률에는 입법자 의사설(立法者意思說)이 있다. 법률 규정을 해석할 때, 그 법을 만든 사람의 의사를 추론하여 그 의미를 밝혀내어야 한다는 학설인데, 입법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대로 그 법을 해석하면, 그 모습을 준행자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입법자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인간과 신의 관계가 정확하게 규정되어 있고, 입법자는 신이신 하나님이고, 준행자는 인간이다.
이 때, 인간이 입법자가 되어 버린 상황을 하나님 없이 내가 신이 되겠다는 발현인 것이고 이것을 ‘교만’이라 부른다.
(*1 고작 인간 앞에서 으스대는 것이 교만이 아니다.)
(2 인간사이의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너무 잣밥 취급 하는 것 아님?)
성경에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로마서의 바울 표현인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고, 모셔 올리는 것’이 내가 입법자 신이 되는 것과 피조물로서의 인정된 상태를 구분하는 모습인 것이며, 야고보서의 입법관과 준행자의 모습으로서 내가 다시 나의 기준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로마서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야고보서 4: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스스로가 무엇을 생각할 때에도, 이미 가치판단이 들어갈 수 밖에 없고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인지 아닌지도 판단하려 드는 고작 피조물의 상태에서, 완전히 하나님이 나의 안에 오셔서 예수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드디어 이 무조건적인 ‘죄’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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