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2.9. 누가복음 6:27-38
본문 말씀을 읽어 보면, ‘돕고 살아야해’, ‘부자가 되기 위해서라도 베풀어야지’ 어떤 이에게는 실제 현실로만 보일 것이다.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필요가 다르다.
무엇을 나는 원하는가?
무엇을 바라는가?
“나는 이 허무하고 공허한 의미 없음에 몸부림칩니다. 세상에 던져진 나의 무기력함에 좌절합니다. 나의 나됨을 스스로 주장하고,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에 탄식합니다. 내 길을 내가 만들어가고, 내 인생을 내가 계획함에 뜻대로 되지 않음을 경험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 삶 속에서 바라는 것들이 이뤄진다면 나는 자유 할 수 있는가?
이 상태에서 견디는 것이 아니다.
이 상태에서의 이탈(離脫) 하는 것이다.
일정한 기간 동안 어려운 환경에 굴복하거나 죽지 않고 계속해서 버티면서 살아 나가는 상태가 되다. 그 남은 시간, 홀로 있는 그 시간은 고통 밖에 없는 것이다.
비판받기 싫거든 비판하지 말고, 용서 받고 싶거든 용서 하라.
비판하지 말라. 용서 하라.
그래 용서가 되는가? 그 마음 깊은 곳까지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형이하학적인 보이는 상황에서만 미워하지 아니한다면 용서가 된 것인가. 이것은 참는 것이지, 용서가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함 받고 싶으면, 우리도 하라는데 우린 못하잖아.
오늘 말씀도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씀하신다.
기억조차 않으시는 하나님
나를 버리고 너희 스스로 살아가는 그 것이 죄인데
그래서 죄인인 니들은 받고자 함과 너희스스로를 위해 그 모든 것을 행하나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이것이야!’를 가르치시는 것 아닌가.
그 사랑을 알아버린 베드로의 모습이 마음을 울린다.
배신했었던 그 베드로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인다.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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