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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3일 목요일

[생삶QT] 20170224 누가복음 10:25-42

2017.2.24. 누가복음 10:25-42
 
< 너 스스로 자비를 베풀 능력이 있는가? >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마태복음 21:5-7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강도에게 강탈당한 이 사람이 그저 나에겐 예수처럼 느껴졌다.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오직 사마리아인이 자비를 베푼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갈 때, “모두가 죽여라라는 말만 외치며 조롱 했을 뿐이다.
 
제사장, 레위인이 특별히 성격지 좆같아서 외면했다고 생각한다면, 왜 예수가 실제로 이 사람역할이 되었을 때 모두가 외면했는가?
 
예수는 곧 있을 사건이며, 모두에게 해당하는 상황임을 보여주신다.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의 차이가 무엇일까?
숱한 무리인 이스라엘 백성과 배신한 제자들과 우리하고의 차이가 무엇인가?
 
사마리아인이 이 사람에게 상처를 치료하기 준 것은 기름과 포도주뿐이다.
 
아무리 자비를 베풀려 하려 해도, 나에게 기름과 포도주가 없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푼단 말인가?
 
제사장과 레위인이 갖고 있었던 것은 율법이었다.
 
율법으로 이 사람못 살린다.
(오히려 지들이 부정타서 죽을까봐 무시한다.)
오직 기름과 포도주로 이 사람살릴 수 있다.
 
우리를 살리시는 저 기름과 포도주가 과연 뭐란 말인가?
 
사마리아인처럼 말씀 따라 사는 것이 결단코 그저 행위를 흉내 내는 것으로 그친다면 사람못 살리는 쭉정이만 될 뿐이다.
 
이 기름과 포도주를 소유하고 있는가?

2017년 2월 19일 일요일

[생삶QT] 20170220 누가복음 9:28-45

2017.2.20. 누가복음 9:28-45
 
< 하나님 형상 >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예수 닮은 삶, 예수처럼 사는 삶, 작은 예수 등은 많이 들어 봤는데; 모세 같이 엘리야와 같이는 좀 어색하다.
심지어 반대 상황이면 하나님이 임하시니 그들에게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나타나게 하시네.’라며 납득하겠는데 예수에게 오히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니? 나니?
 
심지어 그 모습을 보는 베드로의 고백이 더 의아하다.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이건 마치 모세와 엘리야를 포함한 예수의 모습을 보며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느끼는 베드로 아니던가? 근데 그 스스로도 알지 못한 상태로 외치고 있는 모습. 의아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모세와 엘리야는 하나님이란 말인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는 하나님 형상으로 만들었으니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는 것. 그 하나님 형상으로 회복된 모습이 바로 아담; 예수 그리스도.
 
인간과 예수의 공통점은 둘 다 을 입고 있다는 것.
차이점은 인간은 죄인이고 예수는 흠 없는 양(의인)이다.
또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아니하며,
예수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한다.
 
인간에게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어서 인간도 예수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 삼아 주시는 것.
죄인에서 의인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심; 임마누엘로 만드시는 것이다.
 
45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못알 두 번이나 나온다. 베드로도 못알. 나머지도 못알.
 
왜 못 알아 듣는 것일까?
선지자는 깨닫고 알아듣고 전하고, 이와 반대로 모든 백성들은 깨닫지 못하는 상황의 무수한 반복의 스토리를 성경에서 계속 전하고 있지 않은가.
 
제자들이 이렇게 깨닫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깨닫게 되는데 오늘 QT에서도 나오지만 으로 예수님과 함께할 때는 여전히 못 알아 듣는다. (참조. 2)
 
주님을 모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 주님을 알 수 있는가?
 
성령이다.
하나님의 영이고,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에게 직접 보이시며 가르치시며 알게 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이 모세와 엘리야 임하여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 곧 태초부터 계신 예수그리스도시니
이들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
하나님 형상으로 회복되어버린 자들 아니겠느뇨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아멘.
 

2017년 2월 12일 일요일

[생삶QT] 20170213 누가복음 7:36-50

#큐티모아
 
2017.2.11. 누가복음 7:36-50
 
< 인신매매 >
 
또 병자와 의사 이야기 아니던가!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주일 날 교회 가서 예배드리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킨 거야.’라고 생각하며 예배드린 자는 내가 하나님의 뜻을 잘 지켜 행했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빚이 없는 자가 되는 셈이지.)
 
주일 날 교회 가든 안가든,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요.’라고 생각하며 예배드린 자는 내가 하나님의 뜻을 지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수 있는 건가? 생각하게 된다. (빚진 자가 되는 셈이지.)
 
누가복음 5: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빚 없는 자에게는 빚을 탕감해주는 것이 쓸데없고 빚진 자에게라야 쓸데가 있다.
 
내가 뭘 그렇게 빚을 졌나?
난 돈 빌린 적이 없는데?
우리가 뭘 그렇게 빚을 졌나?
 
또 인간하고의 채무관계처럼 이 성경을 읽는다면 내가 뭘 잘못 했나? 그래서 더욱이 성경은 하나님과 나하고의 일대일의 관계를 묻는 것임이 밝히 드러난다.
 
내가 하나님께 빚이 무엇이 있나?
죄의 문제
없음에서 있음으로
멸망에서 구원으로
죽음에서 영생으로
 
모두가 잘 아는 것 과 같이
흠 없는 어린양으로 우릴 사셨다.
그래서 우린 빚진 자다.
당연한 소리다.
우린 하나님께 팔린 자들이다.
 
그럼 주인 뜻대로 되어져야하는데 이 인신매매 당한 인간들이 본인 뜻을 계속 주장하니 그것이 문제가 아닌가!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주인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이라는 것은 함께하는 것이며
그 창조주 되시는 그 하나님이
나의 안에 거하고
내가 하나님 안에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와 같이 취급 되는 것이다.
 
이것이 죄 사함의 실체이고, 진실이며, 진리이다.
 
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평안이라는 것은 구원으로 이뤄지는 것이며, 내가 결단하거나 참거나 면벽수행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와중에 무슨 말인지 존못알아쳐먹는 클라스.
 
스스로 인신매매 하지 마시고,
하나님에게 인신매매 당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2017년 2월 9일 목요일

[생삶QT] 20170210 누가복음 6:39-49

#큐티모아
 
2017.2.10. 누가복음 6:39-49
 
<돌려까기의 진수>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마태복음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오늘 QT에서 그래, 남을 비판하기 먼저 나를 돌아 봐야지.’라고 결론 지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행위에서 불법이 있었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율법의 의보다 지금 더 잘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결국 또 행위로 결론 내린다. 예수그리스도는 없다.
 
마태복음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언뜻 생각하기로는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이해될지 모르겠다. 바울의 고백을 보라.
 
빌립보서 3:5-6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나보다 의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바울은 스스로의 과거를 보여준다. 여기서 과거는 인생사가 아니라 다메섹 동산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전, 즉 하나님과 함께하기 전 의 삶이다. 스스로 홀로 사는 삶.
 
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예수님께서 너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네가 지금 나를 보고 있느냐? 라는 질문이다.
네 안에 내가 있느냐?
너는 누구로 말미암은 것이냐?
지금 네가 생각하는 그 율법의 기준은 너의 티의 기준 아니냐!
이 예수님 앞에서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바리새인들도 하나님 열심히 찾았단 말이다! 길거리에서 조차!)
 
어리석은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쉬운성경] 말라기 3:7 너희 조상 때부터 너희는 내 규례를 따르지 않고 지키지 않았다.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그러면 나도 너희에게 돌아가겠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했다. 그러나 너희는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다.
 
궁금해서 묻는 거 아니다.
우리는 이미 다 지켰고, 하나님께 있는데 어찌 돌아오라 하십니까?
 
오늘은 극단적으로 착각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심금을 울리는 말씀이다. 48-49 주춧돌 이야기도 어제 이야기의 연장선상 아니겠는가? 누구에게는 버린 돌이고 누구에게는 주춧돌이 되는 것처럼, 결론은 예수그리스도가 그와 함께 하는가 하지 아니한가의 이야기를 하신다.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의 도덕적 윤리적 법칙을 보여주셔서 우리를 강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다. 이 세상 속에서 그것을 다 지켜 해내겠습니다.’로 결론 난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요? 다 지켜내면 되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하면, 응답하시어 말씀하시는 그 사랑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돌아오시길 기다리신다.
나 홀로 사는 것을 제일 긍휼히 여기신다.
그래서 그것을 라고 명명해 주신 것이다.
 
참 진리이신 하나님을 받아 들이기 바란다.
내일은 늦는다.
 
Tomorrow's too late, accept Him today.
 
아멘.

2017년 2월 8일 수요일

[생삶QT] 20170209 누가복음 6:27-38

2017.2.9. 누가복음 6:27-38
 
본문 말씀을 읽어 보면, ‘돕고 살아야해’, ‘부자가 되기 위해서라도 베풀어야지어떤 이에게는 실제 현실로만 보일 것이다.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필요가 다르다.
무엇을 나는 원하는가?
무엇을 바라는가?
 
나는 이 허무하고 공허한 의미 없음에 몸부림칩니다. 세상에 던져진 나의 무기력함에 좌절합니다. 나의 나됨을 스스로 주장하고,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에 탄식합니다. 내 길을 내가 만들어가고, 내 인생을 내가 계획함에 뜻대로 되지 않음을 경험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 삶 속에서 바라는 것들이 이뤄진다면 나는 자유 할 수 있는가?
 
이 상태에서 견디는 것이 아니다.
이 상태에서의 이탈(離脫) 하는 것이다.
 
일정한 기간 동안 어려운 환경에 굴복하거나 죽지 않고 계속해서 버티면서 살아 나가는 상태가 되다. 그 남은 시간, 홀로 있는 그 시간은 고통 밖에 없는 것이다.
 
비판받기 싫거든 비판하지 말고, 용서 받고 싶거든 용서 하라.
비판하지 말라. 용서 하라.
그래 용서가 되는가? 그 마음 깊은 곳까지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형이하학적인 보이는 상황에서만 미워하지 아니한다면 용서가 된 것인가. 이것은 참는 것이지, 용서가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함 받고 싶으면, 우리도 하라는데 우린 못하잖아.
 
오늘 말씀도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씀하신다.
기억조차 않으시는 하나님
나를 버리고 너희 스스로 살아가는 그 것이 죄인데
 
그래서 죄인인 니들은 받고자 함과 너희스스로를 위해 그 모든 것을 행하나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이것이야!’를 가르치시는 것 아닌가.
 
그 사랑을 알아버린 베드로의 모습이 마음을 울린다.
배신했었던 그 베드로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인다.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
 
아멘.
 

2017년 2월 7일 화요일

[생삶QT] 20170208 누가복음 6:12-26

2017.2.8. 누가복음 6:12-26
 
복 있는 자, 화 있는 자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있는데 왜 복 있는 자일까?
사람들이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며 너희 이름이 악하다 하는데 왜 복 있는 자일까?
심지어 선지자도 이와 같았다니
 
이러면 누가 하나님 믿어?
저렇게 괴롭다면 왜 믿어?
저렇게 고통 받아야 한다면
왜 그 신을 갈망해야 하지?
 
부요하고 배부르고 모든 사람의 칭찬 받는 자는 화가 있도다.
부요하고 배부른데 화가 있다.
모든 사람의 칭찬을 받는데 화가 있다.
게다가 이것을 거짓 선지자라 하신다.
 
에베소서 1: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결국 오늘 말씀도 같은 내용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본인의 이름을 높이며 스스로 자족하는 상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모습
 
이 모습이 바로 아니던가!
 
마태복음 24: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이미 이고 있음이며, 완성이고 충분하며, 만족하는 에게는 하나님이 필요 없는 상태를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너는 이미 스스로가 위로가 되어 위로 받았고 이미 그 배설물로 배부른 것이다. 하나님의 칭찬이 아니라 세상의 칭찬이 본인에게 더 가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부자 청년 이야기도 뭐가 부자인 것일까?)
 
시편 49:18-20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고난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함께 참예하는 자 되는 이
참 복이 있도다.
 
그 예수가 나를 옥죄어 죄책감을 심어주는 건축가의 버린 돌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되심을 머릿돌이 됨을
같은 예수가 누구에게는 걷어차이는 돌부리도 되고 기초석이 되기도 하니 이것이 정녕 이면적이구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