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4.13. 누가복음 23:26-32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은 과연 은혜였을까?
인간은 자신의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정죄한다. 인간이 인간스스로 십자가를 지게 만든다. 사람이 십자가를 지게 한다. 서로를 사랑하고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힘들 게하고 십자가를 진다.
왜 그럴까? 또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그 예수님의 말을 우리가 해낼 수 있냐 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수 있었던 것은 흠 없는 어린양 즉 대속제물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자였기 때문이고,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짊어지고 가는 이 십자가는 나의 기준으로 만들었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십자가인지 분간도 못한다.
(시어머니가 십자가란다. 남편이 십자가고 부인이 십자가란다. 원수냐? 자녀가 십자가란다.)
인간이 짊어진 십자가와 예수님이 짊어진 십자가가 이렇게 대비된다.
왜 나를 위해 우는 그 여인들을 보고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스스로와 그들이 낳을 자녀를 위해 울라고 했을까?
그들의 슬픔은 예수님의 눈에 보이는 십자가의 고난에 있는 것이고, 실제 그 예수님의 역할(죄에서의 해방)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지금 이 육체적 상황 고난의 상황에서 해방시켜주실 분이 십자가로 잡혀가니 슬픈 것이다.
자신이 세워놓은 기준에 합당하지 아니하니 슬픈 것이다.
이해한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기 저 세상 모든 죄를 지고 갈 어린양을 보라.’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인간기준이며 본인의 의와 자신만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인간이 그런 것이다.
예레미야서 31: 31 이하 너희들은 언약을 깨버린 신부처럼 날 버렸지만 나는 너희를 포기 못해서 나는 너희에게 새 언약을 줄 것이다 너희 속에 내가 내법을 기록해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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